• 국문초록
본고는 우리 선조들이 조선시대에 즐긴 놀이인 從政圖 놀이에 대한 기록과 종정도 놀이를 소재로 창작한 문학 작품을 수합하여 검토하고 분석한 결과물이다. 이러한 연구를 시도한 것은 기존 연구들의 자료 수합이 미흡했던 데다, 특히 종정도 놀이를 소재로 창작한 시문들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은 탓에 우리 선조들이 종정도 놀이를 즐기며 가졌던 사유를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구의 결과 종정도 놀이가 조선시대 내내 널리 향유되었음을 확인하고 우리 선조들이 종정도 놀이를 즐기며 얻은 사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종정도 놀이는 종이에 격자를 긋고 각 칸에 관직의 이름을 적어놓은 뒤 주사위를 굴려 얻은 끗수에 따라 자리를 옮겨 다니며 먼저 최고 관직에 도착하여 은퇴하는 이가 이기는 놀이로, 오늘날의 말판놀이와 비교해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규칙을 자세히 살펴보면 실제 관직의 특성을 반영한 규칙을 설정하여 놀이가 단조로워지는 것을 방지하고 있고,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승진을 어렵게 설정하고 벌칙을 받아도 단번에 게임에서 탈락하는 것을 방지하는 등 난이도를 조절하고 역전의 가능성이 차단되는 것을 막고 있다. 여러모로 놀이의 재미를 위해 고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종정도 놀이는 조선 초의 河崙(1347~1416)이 고려시대에 즐기던 말판놀이인 成佛圖 놀이를 참고하여 제작하였으며, 중국에서 들어온 말판놀이의 영향도 받았다. 종정도 놀이는 조선시대 전시기에 걸쳐 향유되었다. 『朝鮮王朝實錄』, 『承政院日記』 같은 국가의 공식 기록에 종종 언급되곤 하는데, 交年會 때 밤을 새며 즐긴 일, 종정도 놀이 모임을 모반 기도로 오해하여 조사한 사건 등이 기록되어 있고, 英祖(1724~1776)는 신하들과 토론할 때 종종 종정도 놀이의 규칙을 비유로 들곤 하였다. 개인의 일기에서도 종정도 놀이를 즐긴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李文楗 (1494~1567)의 『默齋日記』에는 유배지 星州에서 종정도 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고, 李舜臣(1545~1598)의 『亂中日記』에는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즐겼다는 기록이 있으며, 壬辰倭亂 때 피난 생활을 한 吳希文(1539~1613)의 『瑣尾錄』에서도 즐겼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종정도 놀이는 유배, 전쟁, 피난 같은 시름겨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 선조들의 하나의 위안거리가 되었다고 하겠다. 또 趙克善(1595~1658)의 『忍齋日錄』에는 종정도 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이 32회나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종정도 놀이는 구한말까지도 계속 향유되었다. 19세기 말 개항장을 무대로 활동했던 풍속화가 金俊根(?~?)의 풍속화에서도 종정도 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선시대 내내 널리 사랑받았던 종정도 놀이는 근대에 들어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차차 인기를 잃게 된다. 1920년대 후반까지는 어느 정도 인기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거의 즐기는 사람이 없어져 버렸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종정도 놀이를 시문의 소재로 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단편적이고 건조한 일기류 자료의 기록과는 달리 조선시대 문인들이 종정도 놀이를 즐기며 가졌던 사유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그들은 작품 속에서 종정도 놀이에 열중하다가 놀이가 끝난 뒤에 찾아오는 허무함을 말하기도 하고, 현실의 벼슬살이에 대해 얻은 깨달음을 말하기도 하였으며, 교육적 효용을 들어 독자들에게 종정도 놀이를 즐기기를 바라거나 종정도 놀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미덕을 현실의 벼슬살이에서도 견지할 것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주제어 : 從政圖, 陞卿圖, 陞官圖, 민속놀이, 말판놀이
Ⅰ. 머리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