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문초록
본고는 燕巖 朴趾源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과 대응의 면모를 살펴보았다. 이와 함께 연암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과 대응 방식이 그의 손자 瓛齋 朴珪壽에게 계승・확장되는 양상을 탐색하였다. 연암이 지닌 천주교 인식과 대응의 양상을 살피는 것은 18세기 노론 인사들의 서학-서교에 대한 인식이 어떠하였는가 하는 점을 살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연암은 노론 핵심인 반남박씨 가문 출신으로 北學派를 대표하는 문인이었다. 북학파 문인들은 일찍부터 서양의 과학기술과 자연과학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燕行을 통해서 자신들의 학문적 논의를 진전시켜 나갔다. 하지만 북학파 문인들은 종교적인 부분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북학파 문인들과는 달리, 연암은 천주교에 대해서 허황된 학설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즉 연암은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었지만 천주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친서학-반서교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연암의 천주교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 양상은 沔川郡守 재임 시기의 행적에서 잘 드러난다. 이 시기 연암에게 천주교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꾀어내어 비루한 습성들을 지니게 하는 매우 위험한 사상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천주교에 대한 대응 방식에 있어서는, 천주교도들을 붙잡아 형벌을 가하고 배교를 강요하는 등의 강력한 대응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고, 대신에 수령이 지극한 정성과 진실된 마음으로 백성들에게 신뢰와 감동을 주어 교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연암은 이러한 방식을 직접 실행에 옮겨, 천주교에 빠진 백성들의 마음을 돌리고 배교시키는 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 같은 연암의 천주교에 대한 인식과 대응 방식은 가문 내 후손들에게 계승・확장되었으며, 연암의 손자였던 박규수가 남긴 「闢衛新編評語」에서 이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박규수는 몇 차례 진행된 국가적인 천주교 박해가 실효성이 없었음을 강변하는 한편, 천주교의 확산을 막고 천주교도들을 회유하기 위해 천주교 관련 서적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연구하여 그 모순점을 비판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평안도관찰사로 나아가서는 백성들을 교화하는 데 주력하며 천주교도를 한 사람도 처형하지 않았다. 이러한 천주교에 대한 대응 방식은 조부 연암이 보여준 모습과 상호 참조가 된다.
주제어 : 朴趾源, 熱河使行, 沔川郡守, 西學, 天主敎, 朴珪壽, 闢衛新編評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