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문초록
이 글은 拓跋珪(道武帝) 登國年間 기록을 재검토하여 拓跋珪가 처음부터 代北의 독자적인 세력으로 확립되었다고 기록한 《魏書》 「太祖紀」의 기록이 사실을 왜곡했음을 논증한 논문이다.
383년 淝水의 전쟁 패배 이후 前秦이 붕괴되자 後燕을 세운 慕容垂는 代北의 獨孤部・賀蘭部 등 유목세력를 견제하기 위해 자기 밑에 있던 拓跋珪를 보내 拓跋部의 수장이 되도록 공작하였다. 拓跋珪의 주변에 拓跋部의 수장 자리를 다투는 숙부 拓跋窟咄과 사촌동생 烏渥, 獨孤部의 劉顯, 숙적 鐵弗部의 劉衛辰의 숙적들이 있었다. 後燕은 窟咄, 劉顯의 獨孤部, 賀蘭部 등 적대세력을 격파하여 代北에서 反後燕 세력을 제거하였다. 그러나 代北에서 拓跋部를 견제할 강력한 세력이 사라지게 되어 拓跋部가 상대적으로 강해졌고, 이는 拓跋珪가 後燕으로부터 자립하려는 계기가 되었다.
필자는 本稿에서 北魏 道武帝 登國年間 後燕과 北魏의 관계를 복원하였고, 北魏는 後燕의 代北 정책 가운데 반사이익을 얻었고, 자력으로 劉衛辰의 鐵弗部를 정복한 후에야 後燕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魏書》 「太祖紀」는 처음부터 拓跋部(北魏)가 後燕을 조공국으로 둔 ‘皇帝國’이었으며, 拓跋部와 後燕의 실제 세력관계를 반대로 서술하며 왜곡하였다. 또 前秦이 拓跋部(代)를 정복한 후 영토의 서쪽을 鐵弗部의 군주 劉衛辰에게 다스리라고 한 《魏書》의 기록은 《晉書》, 《魏書》, 《資治通鑑》에 기록된 劉衛辰의 활동 기록을 검토하면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拓跋部는 鐵弗部 정복 이후 鐵弗部 정복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前秦의 拓跋部 정복 이전부터 鐵弗部가 拓跋部의 영토 혹은 屬國처럼 粉飾한 것이다. 이는 拓跋部에 충성했고 舊拓跋部의 동쪽을 통치했던 劉庫仁이 실제로 죽기 전까지 前秦의 苻堅에 충성했다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賀蘭部와 獨孤部는 拓跋部에 의해 강제로 부족(部落)이 해산된 것이 아니라 後燕에 의해 격파되어 後燕의 영토로 遷徙되었고, 拓跋部는 남은 소수의 賀蘭・獨孤 2部의 잔여세력을 어부지리로 얻었을 뿐이었다. 賀蘭部가 수십 部, 獨孤部가 36部를 거느린 세력이었음을 고려하면, 後燕과 拓跋部의 공격을 받아 이산된 諸部는 두 部가 거느리고 있던 수십 部와 36部였다. 즉 賀蘭部와 獨孤部의 “離散諸部” 혹은 “散諸部落”은 부족연합체의 해체와 개별 부족으로의 환원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는 다른 부족들에게도 해당된다.
이 논문은 拓跋部의 멸망부터 北魏의 河北 점령 이전까지 拓跋珪(道武帝)의 초기 기록이 과장되었거나 왜곡되었음을 밝히고 後燕 중심의 代北 遊牧諸部의 세력 관계와 흥망의 原像을 복원했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가 있다.
주제어 : 後燕, 慕容垂, 拓跋珪(道武帝), 窟咄과의 계승분쟁, 獨孤部, 賀蘭部, 鐵弗部, 劉衛辰, 參合陂 전투, 부족해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