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문초록
자석연은 우리나라 고려, 조선시대 벼루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벼루였다. 그러나 자석연에 대한 학계의 연구 기반은 대단히 취약하다. 필자는 고문헌에 나타난 고려, 조선 시기 자석연에 대한 기록을 통해 우리나라 자석연의 정확한 역사와 종류 등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고문헌에 나타난 우리나라 자석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말 정몽주와 박익이 화답한 시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자석연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기록은 조선 초기 1454년(단종 2년)에 완성된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평창자석연에 대한 기록이다. 그런데 李穡이 단양을 여행하며 지은 시 “신축년 겨울 丹山 가는 길에 있었던 일을 기억하다(記辛丑年冬丹山途中)”와 김구용이 정몽주의 요청에 영월의 돌을 손수 깎아 벼루로 만들어 선물했다는 “포은대감이 벼루를 요구해 시와 함께 보내다(圃隱相公求硯, 歌以贈之.)” 등의 시를 통해 고려시대에 이미 단양, 영월, 평창 주변의 자석돌이 벼루로 사용되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고문헌의 기록을 통해 본 우리나라 자석연의 발전사는 조선 전기 강원도 평창과 평안도 선천에서부터 시작하여 조선 중기에 이르면 안동자석연과 곽산자석연이 유명해지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 조선 중후기에 이르면 관서 지역의 벼루는 선천과 곽산의 자석연들이 쇠퇴하고 그 대신 위원과 희천의 자석연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 다음 조선 후기에는 상산자석연도 더해지면서 조선시대 자석연의 발전을 이어갔다.
주제어 : 고문헌, 紫石硯, 세종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려시대, 조선시대